'가끔은 이런 감수성/오글오글 과거의 흔적'에 해당되는 글 38건

  1. 2006.12.10 추억?
  2. 2006.11.14 후회
  3. 2006.10.30 오리온자리
  4. 2006.02.14 3자의 시선
  5. 2006.02.05 풋풋함에 대한 동경

추억?

추억은 때때로 예기치 못하게 눈앞에 찾아오곤 한다.
길을 걷다가 문득 들려오는 노래 한 소절이라던가, 팬시 샵에서 마주한 푸우 인형이라던가. 노래방에서 다른 사람이 부르는 노래라던가 하는 소소한 것들 가운데서 가끔 기억못하고 있던 것들이 불쑥 눈앞에 튀어나오곤 한다.
연말이라던가, 기념일 혹은 명절이라던가 특정한 날에, 그리고 약간의 알콜이 첨가된다면 주변 조그만 사물 구석구석에서 추억 한 자락 들춰보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추상적인 기억이란 객체가 사물에 투영되면서 구체화되는 것인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그리고 추억이란 결국 미화될대로 미화되어버린 기억의 편린이겠지만, 그 덕에 기분좋게 술 한잔 할 때 좋은 안줏거리가 되어주기도 하니 그것만으로도 그 가치를 인정해주지 않을 수가 없네.

가끔 궁금하기도 하다. 나는 어떤 사물에 빗대어 기억되어지고 있을까 싶은.

후회

여느때와 같이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혹은 내리던 날-의 늦은 밤이었다.
우울함에 취한 습관적인 발걸음을 막을 수 없었다.
내딛는 한걸음, 한걸음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반사되어 후회라는 포장을 하고 돌아왔다.
이러면 안되는데 하는 생각과 이율배반적인 행동이 끝도 없는 늪속으로 발을 잡아끄는 것 같았다.

다음날 멍하니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으려니 하릴없는 회한이 밀려왔다.
제 말을 벤 김유신처럼 뭔가 큰 리액션이 있어야 이짓을 그만두지 싶나 헛웃음만 나왔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이라던 내 말에 되돌아온 조소가 눈 앞에서 끊임없는 리플레이를 반복하고 있었다.
문득 이 상황을 즐기는 것은 아닌가- 이 관계에 만족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거듭 반복되는 실수는 더이상 실수가 아니라 의도된 행동임은 알고 있다.

익숙함 때문인가?
외롭기 때문인가?
단지 지쳐서 이를 해소할 대상을 원할 따름인가?
그도 아니면...?!
아니, 난 생각만큼 외롭지도 않고, 지치지도 않았다.
즐겁지는 않지만, 괴로울만큼 스트레스를 받지도 않고 있다.
잔인하게 말해서 어떻게 책임을 진다거나 할 생각도 전혀 없다.

비겁하게도 비단 나의 문제만은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치사하고 유치함의 극치.

무언의 합의.
어쩌면 무폭력의 폭력.
거절하지 못하는 사람과,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아는 사람.
아니다, 거절하지 않는 사람과 거절하지 못할 것을 아는 사람?
어쩌면 거절하지 않는 사람과, 거절하지 않을 것을 아는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뭐가 맞는 것인지도.
뭐가 옳은 것일지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아니, 뭐가 옳은지 그른지는 몰라도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확실히 알고 있다.
때론 생각한대로 행동하는 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오리온자리

때로 진실은 잔혹한 법이다.
하지만 그런 잔인함에 같이 슬퍼해줄 여유가 없다는 것이 안타깝다.
15살 무렵의 나와, 19살 무렵의 나와, 그리고 지금 20 중반을 갓 넘긴 무렵의 내가 느끼는
'의리'라는 단어의 정의와 그 무게감은 사뭇 다른 느낌을 준다.
이해하지 못하던 것들을 (슬프게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때때로 내가 말하고 생각하고 느끼는 것들에 대해 깜짝깜짝 놀라기도 한다. 결국 나만의 이야기가 아니고, 나만의 슬픔이 아니었고, 나만의 아픔이 아니었고, 나만의 비극이 아니었다.
일상에 쫓겨, 내 사정에 쫓겨 같이 슬픈 척, 같이 씁쓸한 척 해줄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은 또 하나의 잔인함일지도 모르겠다.


각설하고-.
새벽 3시를 조금 넘긴 이 시각, 밀려드는 부담감에 잠이 오질 않는다.
잘 수 있을 때 잠을 청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답답하기만 하다. 난 지난 2년간 대체 뭘 하고 지냈던 거냐... ㅠㅠ
잠자리에서 엔간하면 꾸지 않던 꿈을 꾸기 시작했다. 별 의미도, 내용도 없는 웃어넘길만한 꿈이다.
하지만 그냥 웃어넘기지 못하는건 이것이 혹시 작금의 상황이나, 내재된 욕구를 반영하는 뭔가가 아닌가 하는 불안감의 반영이다. 뭐 그래봤자 예전의 그 심각하게 고민하던 (그러나 결국 술안줏거리나 가끔 피식 웃곤 하는 조야한 추억 정도로 여겨지는) 하나의 사소한 일에 지나지 않겠지만.
이짓을 할 시간에 뭔가 생산적인 일을 해야겠지만, 결국 나는 아직 바닥을 치지 못했나 보다.
그럴 정도의 절박함은 아직 없는 것인지, 아니면 느긋하도록 타고 난 것인지. ㅋㅋ

담배 한 대를 물고 하늘을 쳐다보는데 삼태성이 반갑게 고개를 디민다.
가장 처음, 그리고 마지막으로 배운 별자리가 오리온 자리다. 반가움의 탄성이 절로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잿빛 연기 사이로 드문드문 드러난 별들에 잠시 옛 생각에 젖었다.

오리온 자리를 매개로 시작했었기 때문에 그렇게 상처입고, 상처주고 이별했던 것은 어쩌면 숙명이었을까.
오늘은 열아홉, 혹은 스물.. 그 무렵의 꿈을 꾸게 되겠구나.

3자의 시선

퇴근길에 집 앞 정자(?)에서 싸우고 있는 연인을 보았다.
여자가 토라졌다고 그래야 하나, 화가 났다 그래야 하나, 맘이 변했다 그래야 하나.
어찌됐건 남자가 일방적으로 비는 분위기.

지금 담배를 피러 잠깐 나가는데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네.
그리고 그 남자는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몇 층인지 창문만 계속 쳐다보고 있다.
그 여자는 지금 세상 모르게 잠을 자고 있을까, 아니면 창밖으로 남자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을까.

풋풋함에 대한 동경

나이테가 겹겹이 둘러질수록, 그리고 켜켜이 먼지쌓인 앨범이 하나씩 늘어갈수록
하나씩 잊어가고, 하나씩 잊혀지고, 하나씩 잃어간다.

잠시라도 안보면 미칠 것 같던 사람도, 과연 이거 없이 살 수 있었을까 싶던 축구도,
감독이나 적어도 평론가쯤은 되고 싶다는 헛된 꿈속에서 허부적거리게 만들어주던 영화에 대한 열정도
밤사이 몰래 내린 첫눈처럼 스러져버렸다.

사랑은 현실에 산재한 각종 문제에 한참 뒷켠으로 밀려난지 오래고, 축구는 일과 공부에 앞자리를 내주었다.
영화? 재주없는 글솜씨는 차치하고서라도, 이젠 복잡한 영화를 보면 골치가 아플까봐 액션이나 코메디가 우선이다.

사랑을 하고, 이별을 했다.
미칠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며 조심스레 슬쩍 처음 잡던 손이나, 거절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몇날 몇일을 고민하다 시도하던 첫키스.
처음 입술과 입술이 마주닿던 그 순간의 떨림, 그리고 환희.
그 모든 것들이 추억이 되어버렸다.

다시 한번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한다.
가슴졸이던 순간들, 미숙함이라는 탈을 슬쩍 제낀 익숙함이라는 가면을 쓴 또 다른 미숙함.
미숙한 데이트, 어설픈 스킨십, 수많은 대화들과 오해, 그리고 그당시 정말 애절했던 이별.

그리고 또 연애를 한다.
손을 잡아도 되겠다 싶으면 손을 잡고, 이쯤이다 싶을 때 키스를 한다.
거절당하지 않을만한 부탁을 하고, 토라졌다 싶을 때 이정도면 됐다싶은 선물.
장소에 맞춰 적당히 갈만한 식당도, 날씨에 맞춰 적당히 시간 보낼만한 장소들도 대충 안다.
시간과 분위기에 따라 적당히 집에 할만한 거짓말도, 무려 4가지나 준비해 두었다.

첫 데이트 때 어디를 갈까 밤새 고민하던 즐거운 피곤함과
손을 잡아도, 팔짱을 껴도, 키스를 해도- 예전의 그 떨림이나 설레임은 어디로 간건지.

그렇다고 너도 혹시 그렇지 않냐고 물어보면 안 된다는 것쯤-
잘 알고 있다.

2006. 2. 5.

prev 1 ··· 4 5 6 7 8 nex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