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이 1분을 잊겠지만 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뭘 원하는 거죠?"
"친구가 되고 싶어. 내 시계를 일 분만 봐줄 수 없겠어?"
그녀는 일 분 동안 시계를 바라본다.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 우린 일 분 동안 함께했어. 난 잊지 않을 거야. 우리 둘만의 소중했던 일 분을. 이 일 분은 지울 수 없어. 이미 과거가 됐으니."

그는 이 일 분을 잊겠지만 난 그를 잊을 수 없었다.


아마 중학교 3학년 때였나. 아니, 그 때가 분명하다. 그때까지 내가 기억하는 홍콩 영화는 '호소자', '영웅본색', '첩혈쌍웅'이나 '동방불패'정도의 가벼운 액션이었다. 날카로운 첫키스의 추억을 남겨준 그녀와 헤어지고 집에 가던 날, 적적한 마음에 무심코 찾은 비디오 가게에서'첨밀밀'을 빌렸다. 아마도 새로 개봉한 영화를 같이 보자고 약속하고 그를 지키지 못한 애틋함 때문이었을 것 같다. 

그러한 내 심리상태 탓인지 그닥 멜로를 좋아한적도, 좋아하지도 없지만 지금도 최고의 멜로 영화 하면 으레 첨밀밀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어찌보면 우연과 필연으로 점철된 동화같은 얘기지만, 나는 아직도 미키마우스 문신과 등려군의 노래를 가끔 떠올리곤 한다. 이를테면 그것은 나의 사랑에 대한 팬터지이려나.

첨밀밀을 보고 나서, 벅찬 마음에 홍콩 영화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바로 그 때였던 것 같다. 끝도 없이 홍콩 영화에 취해, 느와르에 취해, 정신없이 르네상스의 막바지를 치닫던 홍콩 영화들을 탐독하기 시작했던 것은. 여명으로 시작된 홍콩 배우에 대한 관심이 장국영으로 옮아가면서, 중 3 가을의 어느날 밤, 아비정전을 접했다.

이 영화는 화자인 아비의 나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아비정전 이후의 다른 왕가위의 작품들에 대한 내 느낌은 아비가 왕가위 자신에 대한 페르소나가 아닐까 생각하게끔 만든다. 영화의 서두에서, 왕가위는 자신의 아바타인 아비의 입을 빌어 '발이 없는 새'의 전설을 들려준다. 발이 없어 평생을 날아야 하며 한번의 쉼을 위해서 땅에 내려앉으면 죽어야하는 새의 전설에 대해서.

역시 아비도 그 전설의 새처럼 앉을려고 하지만 좀처럼 그 방황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모성애 결핍과 부친에 대한 증오로 뭉친 그는 세상에 대해 냉소적인, 그러나 뭐라 형용하기 힘든 슬픈 눈을 품은 (그래서 그렇게 우리 곁을 떠난건가)- 그래서 더 매력적인 존재다. 그는 결핍된 애정을 충족하려 끊임없는 사랑을 갈구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의 갈증을 해갈시켜줄 수 없었다.

장국영의 유명한 맘보춤과 함께 널리 알려진 것이 리첸(맞나? 무튼 장만옥이었는데;)과의 유명한 대사이다. 그는 그녀를 1분이라는 시간의 마법 속에 가둬버리지만, 이내 그녀 곁에 안주하지 못하고 발이 없는 새인마냥 떠나고 만다.

유가령과 장학우의 사랑은 언제나 평행선을 달린다. 유가령도 한번의 만남으로 아비를 사랑하고 아비의 절친한 친구인 장학우 역시 그녀를 한눈에 사랑하게 된다. 유가령은 항상 아비를 소유하길 원하지만 늘 버림받고, 장학우는 그녀의 존재를 느끼는 것 그 자체로도 만족한다 (결국 그녀에게 버림받는다;;). 어쩌면 아비와 리첸의 거울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오른손을 들때, 거울 속의 나는 왼손을 드는 것과 같은.

장만옥을 사랑하는 유덕화의 모습도 그와 닮아있다. 힘들때면 전화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하지만 그 역시 방황하며 결국 생계를 위해 배를 탄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던 아비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그 역시 그녀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게되지만, 그에게 그녀와의 조우는 더이상 허락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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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가 어머니를 만나러 가지만, 차마 만나지 못하고 돌아설 때- 나는 장국영이라는 배우를 좋아하게 되어 버렸다.

여러번 봤지만, 시간이 생길때 다시 한번 보고 싶은 영화. 그러나 보고 나면 심한 우울증에 주체할 수가 없기도--; 왕가위께 대체로 그런듯;

매일 같은 시간, 장만옥은 아비를 기다리고 유덕화는 그러한 장만옥의 전화를 기다리던 엇갈리는 일상의 모습 속에서 느끼던 애틋함이 떠오르네. 노박이 아비정전 얘기를 해서 갑자기 생각이 나서 후다닥 건성건성 봤다;; 역시 바쁠 땐 딴짓이 마구 하고 싶어진다. 망했다, 밤새야겠네, 어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