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날로그를 추억하며

이웃님 블로그에 놀러갔다가 몇년만에 귀여운 귀여운 아날로그 테이프 무리 (굳이 얘기하자면 구형 마그네틱 스토리지라고 해야하려나) 의 사진을 접했다. 바야흐로 디지털 시대가 도래하면서 ADC 컨버터 없이는 아날로그 신호를 마땅히 회로적으로 처리하기조차 힘든 시대에 살면서도, 때때로 접하는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끌어내는 기억의 메타포들을 우연히 접할때면 종종 아련한 기분에 젖어들곤 한다. 어쩌면 0과 1의 디짓digit으로 모든 것이 표현되는 (그래서 차갑게만 느껴지는) 디지털의 특성 때문에 LP판이 긁히는 소리조차 지금에와서는 낭만으로 받아들여지는 것 (더불어 요새 아날로그 써킷 디자이너들은 몸값도 킹왕짱이다) 일지도 모른다. 뭐, 난 어차피 막귀라 CD가 짱짱거리네, LP가 음이 풍부하고 부드럽네 하는 내용은 당연히 잘 모른지만 핫핫. 얘기가 한도 끝도 없이 흘러가네.

각설하고.

예전에 좋아하는 노래가 나오면 바로 레코딩 버튼을 누를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해 놓고 라디오를 듣던 기억이 새록거리며 피어난다. 그러고보니 가장 먼저 내 돈을 주고 샀던 앨범은 바로 신승훈 2집이었구나. 한번 사면 뽕을 뽑는 성격이 초등학교 때부터 싹수를 보였던 것인지 여전하여 테이프가 늘어날 때 까지 들었던 기억이 난다. 덕분에 그 다음부터는 앨범을 사자마자 늘어날 것을 대비해서 공테잎에 복사해서 들었던 기억이 나네. 어쩌면 지금보다 그때가 더 집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테잎 2개를 넣을 수 있는, 결과적으로 테잎 복사가 가능한 소형 오디오를 사고 어찌나 기뻐했었는지. 하기사, 그 때보다야 워크맨 선물로 받았을 때가 더 기뻤으려나.

중학교 2학년 때 듀스 3집을 CD로 처음 선물로 받으면서 그 이후 테이프에서 CD로 앨범을 모으는 카테고리가 조금씩 바뀌긴 했지만, CD는 당시 내 입장에서 너무 비싼 하이엔드 제품이었기 때문에 그닥 많이 사질 못했다. 뭐 어쩌면 포터블 CDP가 없어서 더 그랬을 수도 있다. 어쨌건 CD를 조금씩 사모으기 시작하는 와중에도 자주 듣는/듣고 싶던 앨범은 여전히 테잎으로 샀었다. 그 무렵에는 건즈앤로지즈를 필두로 스매싱 펌킨즈, 퀸을 알아가면서 락에 취향을 붙이다 못해 메탈 쪽으로 급격히 취향이 쏠리던 시기였다. 학부 1학년 때 마아녀에게 빌려줬다가 무려 2년만에 돌려받은 (힘들게 갈구면서 받아두고 지금은 어디갔는지도 가물가물한) 판테라의 초기 앨범 카우보이즈 프롬 헬이나 발거 디스플레이 오브 파워를 사기 위해 지리도 모르는 명동거리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 핫핫.

지금 생각하면 열라 유치하게도 당시 날카로운 첫키스를 했던 동네 누나-_-에게 듣기좋은 말랑말랑한 팝송들 중간중간에 멘트를 녹음해서 선물한 적도 있었구나. 푸힛. 학부 2학년 때 어찌어찌 둘이 다시 만나서 그 당시 테잎을 듣고 어찌나 웃었던지. 느끼한 테이프를 선물하던 그 짓은 아마 고등학교 때까지 했던 걸로 기억한다. 블링크의 베티와 키스미가 나왔을 때였으니까 대충 계산하면 나오려나;; 상상 그대로 키스하려고-_-  부러 좋은 노래라고 이어폰을 나눠끼고 노래를 들었던 기억이 나네. 엇차차, 그건 CD였나;;
지금은 들으려 해도 들을 장비조차 모조리 고장이 나서 없는 마당에도 이사다닐 때마다 버리지 않고 기를 쓰고 가지고 다니던 (그리고 어김없이 책장 어름에서 뽀얖게 먼지가 쌓여 천대받고 있던) 녀석들과 눈물의 이별을 한게 바로 이번달인데, 문득 녀석들을 괜히 버렸나 싶기도 하다. 어쩌면 내가 버린 것은 테잎 무더기가 추억의 조각들이었을지도 모르겠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