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난잡체)

무언가 두서없이 의미없는 글을 쓰고 싶은 밤이다. 문체는 간결하고 짧은 호흡보다는 난잡하고 숨이 찰 정도로 구구절절이 늘어지는 만연체가 좋겠다. 만연한걸로는 부족하다. 길면서도, 두서없는- 그래 난잡체라 하자.
진수에게 전화가 왔다. 부사관 학교 졸업하고 특기교육 받는 중이라고 한다. 이녀석... 선희씨랑도 깨지고 뭔가 하나가 나사가 풀어진듯 위태위태하지는 않을까 했는데 의연하게 잘 버티고 있는 듯 하다. 내가 생각하는 진수의 이미지는 모두가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가지고 있던 고등학교 시절, 불완전 연소밖에 못하는 순수했던 시절의 친구일 뿐이었나.
인식-어쩌면 인지라는 단어가 적합할는지도 모르겠지만-이라는 것이 웃겨서 한번 고착화되면 이를 수정하기가 그다지 쉽지만은 않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자아 내부에서 자기가 인식한 대상을 특성화 시키는 한편, 일정한 카테고리 안에 분류하고자 하는 것 때문이 아닐까.
한번 흩트러진 파일은 새로 정리하기 까다로운 법이니까, 저 아무도 모르는 무의식의 어디에선가 자신의 인식을 절대화시키는 무언가가 작용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같아선 뒤집어 엎고 싶었는데... 어른이잖냐.
라고 말하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 자신이 한 사람의 성인이라는 사실을 자각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내가 들었던 그 목소리는, 자각이라기보다는 체념으로, 체념이라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납득으로 들렸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해가 가면 갈수록 세상에는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이나 바라는 바대로와는 정반대인,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일들과 왕왕 마주치곤 한다. 납득할 수 없지만 납득할 수 밖에 없는 체념이라는 단어와 마주하고서 사람들은 조금씩 어른이 되어가는 것을 느낀다나. 어른이라? 어른이 되어간다?
어른이 되어간다는 말에 체념, 그리고 포기라는 단어를 원하던 원하지 않던 점차적으로 납득하고 수용해 간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던가? 어른의 사전적 정의가 무엇인가? 미성년이 아닌 사람? 아니면 아이가 아니면 어른인가? 그러면 아이같은 어른은 뭔데? ..같은 이라는 비유를 사용했지만 결국 어른이라는 뜻인가? 그러면 어른이라는 것은 생물학적인 카테고리 내에서만 분류되는 것이었나? 뭔가 좀 더 고상한 것은 없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내가 생각하는 어른, 다시 말해서 성인이란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 줄 아는 사람이 되는 것- 그리고 위에서 썰을 풀어놓은 것과 마찬가지로 체념이 아니라 납득할 수 없어도 납득할 줄 아는것이다.
나는 나의 말에 실린 무게감을 알지 못한다. 나의 말은 항상 가볍고, 유희를 전제로 깔고 있고, 본심은 철저히 감춘다. 물론 아직 미숙해서 가끔 감정이 실려 공격적이기도 하고, 자조적이기도 하며, 한편으로 자의식 과잉을 여지없이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나의 말은 가벼워서, 손바닥 위에 올려놓아도 그 무게를 느낄 수 없다. 다만 내가 속하고 구성하는 사회적 지위의 특수성 내에서 그 말은 현자의 말과 같이, 선배의 말과 같이, 그리고 생각이 깊은 사람의 말과 같이 무게감을 획득한다. 그러나 일부를 보고 전체가 그렇다고 단언할 수 없듯이, 또는 음과 양, 정과 반, 순과 역과 같이 이치적으로 합치될 수 없는 것들이 아이러니컬하게도 항상 쌍으로 존재하여 완전함(perfect, 태극)을 만들듯이, 그 또한 가벼운 내 말의 피상적 일부인 그림자일 뿐이다. 해서, 나는 내 말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도 쉬이 잊고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쉽게 말을 뒤집고, 번복한다. 손바닥 위에 쌓아놓은 말이 가지는 무게감을 실제로 느낄 수 없기에, 어디에 흘렸는지- 아니면 어디에 버려두진 않았는지 인지하지 못하는 것이다.
끝이라고 단언하고 새로 시작하고, 잊고자 하면서 계속 생각하고, 버리고자 하면서 서랍장 속에 꼭꼭 넣어놓고, 무덤덤해 하면서 핸드폰 에 넣어가지고 다니기도 한다. 예전에 마침표를 찍지 않겠다고 결심하던 그 순간부터, 그리고 어느샌가 나도 모르게 마침표를 다시 찍던 순간부터 나는, 그리고 스무살 첫무렵의 추억은 끝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운명일지도 모른다. 아니, 운명나 숙명이라기보다는 무의식적으로 자연스레 인도된 내 마음의 본래 소리일지도 모른다.
...점점 수습하기 어려울 정도로 대화의 주제가 만개해 간다. 펼쳐진 가지 곳곳에 제각각의 길이 만발하다.
요는, 이제는 어린 나이가 아니지 않겠냐는 것.
그리고 이에 슬퍼한다는 것이다.
결국은 내가 어른이 아니기에 아직 어른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 풀어놓는 이야기 아닌 이야기-글이라고 정의해야 하나?-는 결국 내 혼몽스러운 내 머릿속을 일시적으로만 마비시키기 위한 자극일 뿐이다. 감정적 마스터베이션으로, 사고적 자위 행위로 내 머릿속은 쾌락으로 가득 차고 이윽고 모든 것을 하얗게 잊어가는 것이다. 마치 오늘 내린 눈처럼,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가는 거다. 그리고는 내일 존재할 눈처럼, 모레 존재할 눈처럼 언제 있었냐는 듯이 자연스럽게 스러지겠지. 그리고 나는 다시금 혼란스러울터.
그러나 그것은 그 때의 일이다. 그저 그것만으로 좋다.
마음가는대로 손을 놀리고, 손 가는데로 마음을 놀린다.
그것으로 좋다. 나는 이에 만족한다.
이것이 나의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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